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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House and My Childhood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by Kim Gu Lyrics

Genre: misc | Year: 1929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팔세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21대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모두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매, 내게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향에 망명하시더니,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 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 텃골 팔봉산 양가봉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그곳 뒷개에 있는 선영에는 11대 조부모님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산이 계시고 조모님도 이 선영에 모셨다.

그 때에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이 오직 하나 뿐이었으니,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세를 하는 일이었다. 텃골에 처음 와서는 조상님네는 농부의 행색으로 묵은장이를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군역전이라는 땅을 짓게 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에서 부를 때에는 언제나 군사로 나서는 법이니 그때에는 나라에서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추어 군사라면 천역, 즉 천한 일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쇠약하게 한 큰 원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서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압제를 받아왔다. 우리 문중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을 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드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중년에는 우리 가문이 꽤 창성하였던 모양이어서, 텃골 우리 터에는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또 선산에는 석물도 크고 많았으며, 내가 여남은 살 때까지도 우리 문중에 혼상 대사가 있을 때에는 이정길이란 사람이 언제나 와서 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집 종으로서 속량 받은 사람이라 하니,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의 집에 종으로 태어났던 것이라 참으로 흉악한 팔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해주에 와서 산 뒤로 역대를 상고하여 보면 글 하는 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름난 이는 없었고 매양 불평객이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어사질을 하다가 해주 영문에 갇혔지만 서울 어느 양반의 청편지를 얻어다 대고 겨우 형벌을 면하셨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께 들었다. 암행어사라는 것은 임금이 시골 사정을 알기 위하여 신임하는 젊은 관원에게 무서운 권세를 주어서 순회시키는 벼슬인데, 허름한 과객의 행색으로 차리고 다니는 것이 상례다.

증조 항렬 네 분 중에 한 분은 내가 대여섯 살 때까지 생존하셨고, 조부 형제는 구존하셨고, 아버지 4형제는 다 살아계시다가 백부 백영은 얼마 아니하여 돌아가셔서 나는 다섯 살 적에 종형들과 함께 곡하던 것이 기억된다.

아버지 휘 순영은 4형제 중에 둘째 분으로서,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못 가고 노총각으로 계시다가 스물네 살 때에 삼각혼인이라는 기괴한 방법으로 장련에 사는 현풍 곽씨의 딸, 열네 살 된 이와 성혼하여 종조부 댁에 붙어살다가 2, 3년 후에 독립한 살림을 하시게 된 때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 어머님의 나이는 열일곱이요, 푸른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서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라고 어머님은 늘 말씀하셨다.

병자년 7월 11일 자시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6, 7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 되고,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온갖 시험을 다 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한다. 겨우 열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며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먼 촌 족대모 핏개댁이 밤중이라고 싫은 빛 없이 내게 젖을 물리셨단 말을 듣고 내가 열 살 갓 넘어 그 어른이 작고하신 뒤에는 나는 그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 내가 마마를 치른 것이 세 살이 아니면 네 살 적인데, 몸에 돋은 것을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스리던 죽침으로 따서 고름을 빼었으므로 내 얼굴에 굵은 벼슬 자국이 생긴 것이다.

내가 다섯 살 적에 부모님은 나를 데리시고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셨다. 거기는 뒤에는 산이요, 앞은 바다였다. 종조, 재종조, 삼종조 여러 댁이 그리로 떠났기 때문에 우리 집도 따라간 것이었다. 거기서 이태를 살았는데, 우리 집은 어떻게나 호젓한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집 문 앞으로 지나갔다. 산 어귀 호랑이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면 한 걸음도 문 밖에는 나서지 못하였다. 낮이면 부모님은 농사하러 다니시거나 혹은 바다에 무엇을 잡으러 가시고, 나는 거기서 그 중 가까운 신풍 이 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가 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 집 아이들 중에는 나와 동갑되는 아이도 있었으나, 두세 살 위 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애들이 이놈 해줏놈 때려 주자고 공모하여 나는 무지하게도 한 차례 매를 맞았다. 나는 분해서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서 큰 식칼을 가지고 다시 이 생원 집으로 가서 기습으로 그놈들을 다 찔러 죽일 생각으로 울타리를 뜯고 있는 것을, 열일고여덟 살 된 그 집 딸이 보고 소리소리 질러 오라비들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목적을 달치 못하고 또 그놈들에게 붙들려 실컷 얻어맞고 칼만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칼을 잃은 죄로 부모님께 매를 맞을 것이 두려워서 어머님께서 식칼이 없다고 찾으실 때에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또 하루는 집에 혼자 있노라니까 엿장수가 문전으로 지나가면서,

"헌 유기나 부서진 수저로 엿을 사시오."

하고 외쳤다.

ㅠ력은 날로 줄었다. 이에 최고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나는 동학접주의 칭호를 버리기로 하고, 내 군대를 허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는 나의 병권을 빼앗으려 함이 아니요, 나를 살려내고자 하는 계책이었다. 이에 허곤은 송종호로 하여금 평양에 있는 장호민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가지고 평양으로 떠나게 하였으니, 이것은 황주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함이었다.

이때에 내 나이가 열아홉, 갑오년 섣달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나고 두통이 심하여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은당 대사는 나를 그의 사처인 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몸소 병구완을 하였다. 며칠 후에 내 병이 홍역인 것이 판명되어서 하은당은,

"홍역도 못한 대장이로군."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홍역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늙은 승수자 한 분을 가리어 내 조리를 맡게 하였다.

이렇게 병석에 누워 있노라니, 하루는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고,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는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원래 사기가 저상한데다가 장수를 잃은 나의 군사는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도 흉하게 도망하여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이동엽의 호령이 들렸다.

"김 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영장 이종선 이놈만 잡아 죽여라."

하고 외쳤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을 차고 마루 끝에 뛰어 나서서,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행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 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

하고 외쳤다.

이동엽이 부하에게 명하여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게 하고 이종선만을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동구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이동엽의 부하는 다 물러가고 말았다.

이종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구로 달려 내려갔다. 과연 그는 총에 맞아 쓰러졌고, 그의 옷은 아직도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안고 통곡하다가 내 저고리를 벗어 그 머리를 싸주었다. 그 저고리는 내가 남의 윗사람이 되었다 하여 어머니께서 지어 보내신, 평생에 처음 입어보는 명주 저고리였다. 동민들은 백설 위에 내가 벌거벗고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 입혀주었다. 나는 동민들을 지휘하여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이종선은 함경도 정평 사람으로, 장사차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다. 총사냥을 잘하고, 비록 무식하나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어서 내가 그를 화포령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종선을 매장한 나는 패엽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부산동 정덕현 집으로 갔다. 내게서 그 동안 지낸 일을 들은 정씨는 태연한 태도로,

"이제 형은 할 일 다 한 사람이니 나와 함께 평안히 유람이나 떠나자."

하고 내가 이종선의 원수 갚을 말까지 눌러버리고 말았다. 이동엽이 패엽사를 친 것은 제 손으로 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경군과 왜병이 이동엽을 치기를 재촉할 것이라고 하던 정씨의 말이 그대로 맞아서, 정씨와 내가 몽금포 근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 이동엽은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구월산의 내 군사와 이동엽의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몽금포 근동에 석 달을 숨어 있다가 나는 정씨와 작반하여 텃골에 부모를 찾아뵈옵고, 정씨의 의견을 좇아 청계동 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는 패군지장으로서 일찍 적군이던 안 진사의 밑에 들어가 포로 신세가 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정씨는 안 진사의 위인이 그렇지 아니하여 심히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과, 전에 안 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에게 오라는 뜻이라고 역설함에 나는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텃골 본향에서 부모님을 뵈온 이튿날, 정씨와 나는 곧 천봉산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려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4, 50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 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이라는 안 진사의 자필 각자가 있었다.

동구를 막을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 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내주고 얼마 있노라니 의려장의 허가가 있다 하여 한 군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 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안 진사 6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했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 석 자를 횡액으로 써 붙였다. 안 진사는 우리를 정청에 영접하여 수인사를 한 후에 첫말이,

"김 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면하신 줄을 알았으나 그 후 사람을 놓아서 수탐하여도 계신 곳을 몰라서 우려하였더니 오늘 이처럼 찾아주시니 감사하외다."

하고 다시,
"들으니 구경하시던데 양위분은 안접하실 곳이 있으시오?"

하고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는 뜻을 말하였더니, 안 진사는 즉시 오일선에게 총 멘 군사 30명을 맡기며,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 석사 부모 양위를 뫼셔오되, 근동에 있는 우마를 징발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반이해 오렸다."

하고 영을 내렸다.

이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우접하게 되니, 내가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월 일이었다.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5 개월이었지만, 그 동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 진사와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 산림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

안 진사는 해주 부중에 10여 대나 살아오던 구가의 자제였다. 그 조부 인수가 진해 현감을 지내고는 세상이 차차 어지러워짐을 보고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하여,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주고 약 300석 추수하는 재산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는 산천이 수려하고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을 취함이었다. 이 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때였다. 안 진사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여섯 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있는 벗을 사귀기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형제가 다 문장재사라 할 만하지마는,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 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내가 보기에도 퍽 소탈하여서,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정녕하여서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이 매우 청수하나 술이 과하여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전송되었고, 내게도 그가 득의의 작을 흥 있게 읊어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황석공소서'를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 취흥이 나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그때 안 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세 살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색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어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계부 태건과 언제나 함께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이고, 또 진사 6형제의 주연의 안주를 삼았다. 진사의 둘째 아들 정근과 셋째 공근은 다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도련님들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진사는 이 두 아들에 대해서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는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과 동문으로서, 해서에서는 행검으로 굴지되는 학자였다. 이 이도 안진사의 초청으로 이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 진사의 사랑에서였다. 그런데 자기의 사랑에 놀러오라는 그의 말에 나는 크게 감복하여 이튿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선생은 늙으신 낯에 기쁨을 띠시고 친절하게 나를 영접하시며 맏아들인 원명을 불러 나와 상면케 하였다. 원명은 나이 서른 살쯤 되어 보였는데 자품은 명민한 듯하나 크고 넓음이 그 부친의 뒤를 이을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원명에게는 15, 6세나 된 맏딸이 있었다.

고 선생이 거처하시는 방은 작은 사랑이었는데, 방 안에는 책이 가득 쌓여있고, 네 벽에는 옛날에 이름난 사람들의 좌우명과 선생 자신의 심득 같은 것을 둘러 붙였으며, 선생은 가만히 꿇어앉아서 마음을 가다듬는 공부를 하시며 <손무자>, <삼략> 같은 병서도 읽으셨다.

고 선생은 나더러, 내가 매일 안 진사의 사랑에 가서 놀더라도 정신 수양에는 효과가 적을 듯하니, 매일 선생의 사랑에 와서 세상사도 말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대 선생이 나에게 대하여 이처럼 특별한 지우를 주시는 것을 눈물겹게 황송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는 좋은 마음 가진 사람이 되려던 소원을 말씀드리고 모든 것을 고 선생의 지도에 맡긴다는 성의를 표하였다. 과거에 낙심하고 관상에 낙심하고 동학에 실패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나 같은 것도 고 선생과 같으신 큰 학자의 지도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말씀을 아뢰었더니 고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남의 일을 어찌 알랴. 그러므로 내가 그대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그대에게 확실히 말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성현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자취를 밟으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써 가노라면 성현의 지경에 달하는 자도 있고, 못 미치는 자도 있거니와, 이왕 그대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으니 몇 번 길을 잘못 들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만 힘쓰라."

이로부터 나는 매일 고 선생 사랑에 갔다. 선생은 내게 고금의 위인을 비평하여 주고, 당신이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가르쳐주고, <화서아언>이며 <주자백선>에서 긴요한 절구를 보여주셨다. 선생이 특히 역설하시는 바는 의리에 관해서였다. 비록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이 된다고 하셨다.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치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 정신과 재질을 보셔서 뚫어진 곳은 깁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첩경을 택하셨다. 선생은 나를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셨음인지, 아무리 많이 알고 잘 판단하였더라도 실행할 과단력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고 말씀을 하시고,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

라는 글귀를 힘있게 설명하셨다.

가끔 안 진사가 고 선생을 찾아오셔서 두 분이 고금의 일을 강론하심을 옆에서 듣는 것은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끔 고 선생 댁에서 놀다가 저녁밥을 선생과 같이 먹고, 밤이 깊어 인적이 고요할 때까지 국사를 논하는 일이 있었다.

고 선생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전국에 충만하여 궐내에까지 침입하여서 대신도 적의 마음대로 내고 들이게 되었으니 우리나라가 제 2의 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고에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아니한 사람이 있던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의 일건사가 남아있을 뿐이다."

선생은 비감한 낯으로 나를 보시며 이 말씀을 하셨다. 나는 비분을 못 이겨 울었다.

망하는 우리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해서 선생은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고 하시고, 그 이유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국이 갑오년 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러 할 것이니, 우리 중에서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그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두었다가 후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나와 같이 어린 것이 한 사람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되랴 하는 뜻을 말씀드린즉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정계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나 상계에, 이처럼 자기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나는 청국으로 떠날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고 선생께 아뢰었다. 선생은 크게 기뻐하셔서 내가 떠난 뒤에는 내 부모까지 염려 마라 하셨다.

나는 의리로 보아 이 뜻을 안 진사에게 통함이 옳을까 하였으나, 고 선생은 이에 반대하셨다. 안 진사가 천주학을 믿을 의향이 있는 모양인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양이를 의뢰하려 함이니 대의에 어긋나는 일인즉 지금 이런 큰일을 의논할 수 없다. 그러나 안 진사는 확실한 인재니, 내가 청국을 유력한 뒤에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서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나 고 선생의 지시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